[ TWO CHAIRS ]연구소
일본이 먼저 설계한
100세 시대 금융
Writer. 심현정
(우리금융경영연구소 금융혁신연구실 수석연구원)
Photo. 프리픽
장수는 단순한 자산 축적을 넘어 생애주기 전반에 걸친 종합적인 자산관리를 요구한다. 경제 활동기에는 장기적 적립·분산 투자를 통해 자산을 형성하고, 은퇴 전후에는 축적한 자산의 운용과 인출 계획을 구체화해야 한다. 고령 후기의 간병 부담과 인지·판단 능력 저하에 대비한 자산 보호와 승계 계획도 준비할 필요가 있다. 초고령사회 일본은 100세 시대 금융을 어떻게 준비해 왔을까?
‘노후 파산’의 공포를 줄이는 방법
2007년, 해마다 평균수명이 최고치를 경신하던 일본은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다. 그즈음 일본 사회를 뒤흔든 단어가 바로 ‘노후 파산’이다. 일본 국민이 노후 준비에 소홀한 것은 아니었지만, 수명의 연장은 죽기 전에 자산이 먼저 고갈될 것에 대한 두려움을 일으켰다. 고령자들은 노후 파산을 피하기 위해 소비를 줄이고, 자녀에게 자산을 물려주기보다 죽기 전까지 가지고 있으려는 경향을 보였다. 그 결과 고령자층 삶의 질은 낮아지고, 경제 시스템 속에서 소비와 재산 이전을 통한 부(富)의 순환이 정체되면서 사회 전반의 활력이 저하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 정부가 찾은 해법은 초고령사회 맞춤형 생애 자산 관리로 가계경제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이었다. 금융청은 2019년 ‘고령사회에서의 자산 형성과 관리’ 보고서를 통해 정부와 금융회사, 국민이 숙지해야 할 고령사회 자산관리의 기본 원칙을 정의했다. 골자는 경제 활동기에는 자산 형성, 은퇴 전후에는 운용·인출 계획 수립, 고령기에는 인지능력 저하와 자산 승계 대비 등 생애주기에 따라 자산관리의 초점을 달리하는 것이다. 이는 비단 개인과 가계에만 국한될 원칙이 아니라, 정부와 금융업계가 법· 제도를 정비하고 필요한 금융상품과 서비스를 공급할 때 주지해야 할 원칙으로 강조되며, 실제로 사회시스템과 시장의 변화로 이어졌다.
노후 준비의 시작은 경제활동기 장기투자로부터
일본 정부가 경제 활동기 국민들이 장기·적립·분산 투자로 자산을 충분히 형성할 수 있도록 설계한 제도가 바로 NISA와 iDeCo이다. NISA는 주식과 펀드 등에 소액 투자해 얻은 수익에 비과세 혜택을 부여하는 상품이고, 개인연금 계좌인 iDeCo는 납입·운용·수령 단계에 따라 납입 액 소득공제, 운용수익 비과세, 연금 수령시 세제 우대 등 혜택을 제공한다. 사실 두 상품 모두 처음 도입되었을 당시에는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후 정부가 국민의 노후 자산 형성을 돕기 위해 두 상품을 활용하기로 하고 지속적으로 가입 대상, 세제 혜택, 투자 한도 등을 투자자 지향적으로 개선하면서 국민의 주요한 투자수단으로 자리 잡게 됐다. 특히 2024년 1월 도입된 신(新)NISA의 경우 비과세 투자 금액 한도가 크게 상향되고, 비과세 기간 제한이 없어지는 등 과감한 제도 개편이 이루어졌다. 신NISA는 출시 이후 일본 주식시장 호조에 힘입어 큰 인기를 끌었으며, 국민의 노후 투자자산 증대에 상당히 기여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은퇴 후에는 자산 활용 방안을 고민해야
은퇴하기 전까지 자산을 열심히 투자하고 모았다 해서 노후 준비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계획 없이 목돈을 헐어 쓰기에는 오래 살 가능성이 너무 큰 시대다. 아무리 절약한다 해도 근본적인 자산 고갈의 두려움을 해소할 수 없기 때문에 명확한 현금흐름 창출 방안이 마련되어야 비로소 노후 대책이 완성될 수 있다. 퇴직은 자산 축적에서 활용으로 넘어가는 전환점이 된다. 퇴직급여와 공적·사적 연금, 예금, 투자자산을 점검하고 의료비 등을 포함한 생활비, 연금 인출 관련 세제 혜택 등을 고려한 정교한 인출 계획을 세워야 한다. 이와 관련해 일본 금융청은 소비자들이 자신의 노후 수지를 비롯해 금융상품과 서비스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금융회사가 각종 정보를 도식화해 보여 주도록 장려하고 있다. 은퇴자들이 자신의 현재와 미래 상황을 명확히 인지하고 준비해 노후를 탄탄히 설계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간병과 인지 저하 관리도 자산관리의 영역
오래 살수록 의료비와 간병비는 필연적으로 늘기 마련이다. 일본은 2000년 공적 요양 보험인 ‘개호보험’을 도입해 거동과 일상 수행이 어려운 고령자의 요양 부담을 줄이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러나 개호보험은 기초적인 안전망 역할을 할 뿐이다. 간병 용품 구입, 주택 개조, 간병인 고용 등에 드는 직접 비용이나 가족을 간병하는 구성원의 소득 감소와 같은 기회비용까지 포함하면 장수로 인해 개인과 사회가 지는 간병 부담은 매우 크다.
일본 보험업계는 고령자 가계의 의료비·간병비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간병 보험과 치매 보험을 적극적으로 개발해 왔다. 최근에는 진단 보험금을 지급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요양 등급이 개선되면 응원금을 지급하거나, 치매에 걸린 피보험자로 인한 금전적 피해(사고 배상, 실종자 수색 비용 등)를 보상하는 등 피보험자와 가족의 실질적 수요를 반영해 보장 범위를 넓힌 상품도 많아졌다. 특히 간병 퇴직이 사회문제로 대두되면서 임직원의 부모 간병 부담과 그로 인한 퇴사를 줄이기 위해 단체보험에 ‘부모 간병에 의한 휴업 보상 특약’을 포함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이것은 고령사회에 대응하는 금융의 적극적 역할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들이라 할 수 있다.
사후 절차가 아닌 생전 설계로 확장된 상속
일본 금융업계가 주목한 또 다른 영역은 신탁을 활용한 자산 승계다. 2020년대 들어 일본은 연간 사망자 수가 130만 명에 이르면서 세대 간 자산 이전이 대규모로 일어나는 ‘대상속 시대’가 도래했다. 준비되지 않은 죽음과 상속은 가족 간 갈등을 낳거나, 오랜 기간 유지해온 가업과 자산의 전통성이 상실되는 비극을 야기하기도 한다. 정부도 자산과 사업의 세대 간 원활한 승계를 지원하는 금융서비스 개발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으며, 일본 금융업계는 이에 따라 유언신탁, 유언대용신탁 등 다양한 신탁상품과 사후 준비 서비스를 개발하고 있다. 고령자들은 신탁을 통해 자산관리와 사용 방향을 미리 정해둠으로써 자신의 유고 시에도 계획대로 자산을 관리할 수 있으며, 이는 본인뿐 아니라 남은 가족의 안정적인 생활을 뒷바침한다. 사후 대비 설계는 비단 자산가뿐 아니라 대다수 고령자에게 중요한 과업이다. 그 때문에 일본 금융회사들은 스마트폰으로 재산 내역과 가족에게 전할 내용을 기록하는 디지털 엔딩 노트 등의 서비스도 적극적으로 제공하고 있다.
장수가 축복이 되기 위한 금융을 위해
일본의 100세 시대 금융은 특별한 제도나 상품 하나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생애주기별 자산관리 원칙 아래 정부와 금융회사가 제도, 상품을 통해 국민 인식 변화와 자산관리 노력을 적극적으로 유도·지원하는 과정에서 그 틀이 잡힐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2024년 말 초고령사회에 진입했지만, 아직 금융제도와 시스템은 초고령사회 대응에 부족한 점이 많다. 특히 은퇴 후 자산운용과 인출, 고령 후기 간병과 인지 저하에 대한 대비책이 부족하다. 일본의 사례를 상고 해볼 때 그 시작은 고령사회의 자산관리 원칙에 대한 정부와 시장, 국민의 공감적 인식에 있다. 초고령사회로 접어든 지금 ‘고령기를 위한 자산 축적’에만 국한하지 않고 ‘생애 전 과정과 삶의 전 영역’을 아우르는 자산관리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한 때다.
이번 호에서는 <일본 경제 대전환>의 첫 번째 주제로, 일본이 ‘고령사회의 자산관리’를 어떻게 설계했는지 살펴봤다. 우리금융경영연구소가 집필하고 위즈덤하우스에서 2025년 6월 발간한 <일본 경제 대전환>은 저출산·고령화를 먼저 경험한 일본이 경제와 금융 시스템을 어떻게 재편하고, 새로운 성장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지 분석한 책이다. 앞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