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END]Health
치매 위험 줄이는
주거 공간 처방
우리가 사는 집의 공간을 아주 조금만 바꿔도
뇌의 노화를 늦출 수 있다.
뇌 건강을 지키는
공간의 조건에 대해 알아본다.
Writer. 한소영 Photo. 게티이미지뱅크, 언스플래시
Reference. <뉴로테리어>(손혜주 지음, 한국경제신문 펴냄)
바야흐로 100세 시대다. 기대 수명이 높아질수록 치매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도 높아진다. 사람들은 흔히 선을 긋고 ‘정상인’과 ‘치매 환자’로 구분하려 하지만, 치매는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사고처럼 걸리는 게 아니다. 무려 20여 년간, 아주 긴 시간에 걸쳐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는 질환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방할 수 있을까? 답은 의외로 공간에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은 오감을 통해 뇌에 영향을 준다. 벽지 색, 조명의 밝기, 가구의 각도, 바닥재의 모양 등 모든 것이 뇌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에 개입한다. 실제로 2025년 발표된 대규모 추적 연구는 공간이 뇌에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인지 기능이 정상인 일반인 1만여 명을 9년간 추적한 연구 결과, 시각적으로 잘 정돈된 집에서 사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인지 기능 저하 위험이 12.5% 낮았다. 오늘 우리가 머무는 공간이 10년 뒤 나의 기억을 지킨다면 누구라도 공간을 방치할 수 없을 것이다. 주목할 점은 뇌를 지키는 데 굳이 큰돈이나 거창한 공사가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치매를 예방하는 공간은 특별한 시설이 아니라, 일상의 집으로도 충분하다. 가구 배치를 조정하는 일 하나만으로도 뇌를 위한 실질적 처방이 될 수 있다.
바닥과 벽 색상이 같은 복도. 오히려 시야가 더 혼란스럽다
분위기 | 미니멀리즘, 과하면 독
최근 유행하는 무채색 위주의 미니멀리즘 인테리어는 뇌 과학적으로 본다면 무조건 권장하기는 어렵다. 시각적 자극이 지나치게 통제된 환경은 자칫 뇌의 감각을 둔한 상태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여러 연구에 따르면 다양한 소재와 색채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공간이 뇌의 시각 피질을 적절히 자극해 뇌 건강에 훨씬 이롭다.
공간 분위기를 너무 차갑고 매끄럽게 조성하는 건 피하는 편이 좋다. 대신 식물의 초록빛과 따뜻한 자연의 질감을 집 안에 들여보자. 일명 ‘바이오필릭 Biophilic’ 디자인이다. 예를 들면 실내 마감재를 나무의 향기나 결, 돌의 질감 등을 느낄 수 있는 친환경 자재를 쓰는 것이다. 이러한 자재에서 오는 기분 좋은 자극은 뇌세포 생성을 돕는 BDNFBrain-Derived Neurotrophic Factor 단백질 분비를 촉진하고,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 분비를 낮춘다. 지나친 미니멀리즘 대신 자연을 닮은 인테리어를 고민해 보자.
바닥과 벽의 적절한 대비가 공간의 윤곽을 만들어 안정적으로 느껴진다.
색상 | 바닥은 어둡게, 천장은 환하게
우리가 길을 걸을 때 편안하게 방향을 잡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발이 닿은 바닥, 머리 위의 하늘, 그리고 건물 벽 등 사방의 면이 시각적으로 뚜렷하게 구분되어 내가 어디에 서 있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뇌가 쉽게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실내 공간도 마찬가지다. 뇌에 편안한 안정감을 주는 방법은 공간의 무게중심을 아래로 잡아주는 것이다. 우리 눈과 뇌는 본능적으로 발밑이 묵직하고 머리 위가 가벼울 때 비로소 안심하고 안정된 상태에 놓인다. 게다가 노화로 시야가 흐려지면 바닥과 벽 및 천장의 색이 비슷하게 뭉개져 보이고, 공간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해 허공에 붕 뜬 듯한 막막함과 불안을 느낀다. 바닥재는 짙은 우드나 차분한 그레이 톤을 선택해 단단한 대지처럼 받쳐주자. 반대로 벽과 천장은 밝은 크림색이나 하늘색으로 마감해 탁 트인 개방감을 주는 것이 도움이 된다.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나 무의식적으로 안도감을 느끼는 감각적인 공간 연출법이다.
복잡한 패턴이 없는 파스텔 톤 벽이 시각적 안정감을 준다.
무늬 | 익숙하고 절제된 패턴 전략
인테리어를 할 때 흔히 화려한 벽지나 추상적 무늬의 바닥재로 장식해 단조로움이나 평범함을 탈피하고 싶어 한다. 지나친 미니멀리즘을 지양하는 건 좋지만, 뇌가 예민한 상태에서는 이 장식들이 시각적 소음이 되어 뇌를 피로하게 만들 수 있다. 너무 복잡하고 산만한 패턴은 뇌를 끊임없이 자극하기 때문이다. 반면 익숙하고 절제된 패턴은 공간이 안전하고 예측 가능하다는 신호를 준다. 복잡 한 꽃무늬 벽지보다는 무늬 없는 단색의 차분한 마감재가 시각적 혼란을 막고, 평온한 상태를 지켜주는 안전한 선택이다.
색상 또한 중요한데, 지나치게 어둡거나 강렬한 원색보다는 중간 밝기의 부드러운 색상이 바람직하다. 이를테면 흙을 닮은 따뜻한 베이지, 나뭇결이 살아 있는 연갈색, 숲을 연상시키는 차분한 올리브그린이나 맑은 하늘색 등이다. 자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색상은 시각적 자극을 줄이고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
크게 울리는 초인종 소리는 간혹 위협적으로 들린다
소리 | 소음 먹는 공간의 조성
현대인의 뇌는 24시간 과부하 상태다. 여기에는 끊임없이 울리는 알림음 같은 소음이 크게 작용한다. 귀를 찌르는 생활 소음으로 집에서조차 뇌는 쉬지 못한다. 크게 울리는 초인종 소리는 간혹 위협적으로 들린다.
그러므로 공간의 소음을 관리하는 것은 곧 내 뇌의 휴식을 돕는 일이다. 집은 뇌가 외부 자극을 끄고 쉴 수 있는 아늑한 ‘동굴’이 되어야 한다. 핵심은 집 안에서 소리가 윙윙대며 맴돌지 않게 벽이 소리를 부드럽게 흡수하도록 하는 것이다. 거실 벽에 딱딱한 액자 대신, 소리를 부드럽게 감싸는 패브릭 소재의 그림을 걸거나 아트 월을 꾸며보자. 털이 짧은 카펫을 까는 것도 효과적 방법이다. 공사를 하지 않고 집안 소품을 살짝 바꿔도 소리의 반사가 줄어들고, 불필요한 울 림을 막아준다. 또한 대화도 편안해지고 공간에 차분한 깊이감이 생긴다.
tip. 지친 뇌를 위해 이것만은 지키세요!
1. 침대 머리맡은 기계와 멀리 두기
소음이 심한 세탁실은 침실에서 가장 먼 곳에 있어야 한다. 침실 벽 너머가 세탁실이라면 벽 쪽에 옷장이나 책장을 두어 소음을 한 번 더 차단해주는 ‘가구 방음벽’을 세우자.
2. 초인종 볼륨 한 단계 낮추기
갑작스러운 “딩동” 소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심장을 뛰게 한다. 월패드(인터폰) 설정을 확인해 벨 소리 크기를 한 단계만 낮춘다.
3. 도어 클로저 설치하기
문이 갑자기 쾅 닫히는 소리는 위협적으로 들린다. 문이 쾅 닫히는 이유는 속도가 제어되지 않기 때문이다. 문 상단에 도어 클로저를 설치하면 문이 천천히 닫히게 할 수 있다.
고개만 돌리면 공간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실내
구조 | 공간을 시각적으로 연결하기
현처음 가본 낯선 건물에서 길을 잃고 당황한 적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어디에 뭐가 있을지 모른다는 막막함은 뇌를 긴장시킨다. 반면에 내가 가야 할 곳이 눈앞에 훤히 보인다면 마음이 편안할 것이다. 인지 기능이 조금씩 떨어질수록 집은 ‘설명서가 필요 없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핵심은 공간의 시각적 연결성을 만드는 것이다.
생활의 중심이 되는 공간들이 시각적으로 막힘없이 연결되어 있는지 확인해 보자. 방문을 열고 나왔을 때 거실에 가족이 모이는 공간이 보이고 창밖의 밝은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면 우리 뇌는 그 즉시 깊은 안도감을 느낀다. 거실, 식당, 주방의 경계를 허무는 ‘오픈 LDKLiving Dining Kitchen 구조’를 활용하자. 고개를 돌렸을 때 목적지가 훤히 보이도록 시야를 답답하게 가로막는 벽이나 덩치 큰 가구는 과감히 치우는 것이 좋다.
적절하게 배치한 의자는 훌륭한 안식처가 되어준다.
가구 | 의자 하나로 ‘나만의 안식처’ 만들기
아무리 사랑하는 가족이라도 줄곧 마주해야 한다면 피곤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 뇌는 외부 자극을 처리하는 ‘집중 모드’와 멍하니 휴식을 취하며 정보를 정리하는 ‘디폴트 모드’를 오가야만 비로소 건강한 균형을 찾는다. 이를 위해 꼭 거대한 서재 같은 개인 공간이 필요한 건 아니다. 거실의 가장 밝은 창가, 또는 가장 아늑한 구석에 1인용 안식처를 만들어보자. 창가에 의자를 하나 두는 것만으로도 변화는 시작된다. 이때 중요한 점은 의자의 방향을 중앙을 과감히 등지고 창문 쪽으로 향하게 놓는 것이다.
의자는 딱딱하게 고정된 것보다는 몸의 곡선을 부드럽게 감싸주며 앉았을 때 기분 좋은 탄성이 느껴지는 암체어가 적당하다. 그 옆에 키 큰 초록 식물을 두면 완벽하다.
관리 | 정리하고 수선하기
무질서한 공간은 뇌의 에너지를 갉아 먹는다. 프린스턴 대학교 연구진은 이것이 뇌 속에서 벌어지는 ‘신경 경쟁 Neural Competition’ 때문임을 밝혀냈다. 처리 용량에 한계가 있는 우리 뇌의 시각 피질은 시야가 혼잡하면 여러 자극에 주의를 끌기 위해 서로 경쟁하면서 상호 억제 현상이 발생한다. 반면 물건이 잘 정돈된 환경에서는 이러한 신경 경쟁이 줄어들어 뇌의 한정된 인지 자원을 중요한 곳에 온전히 쓸 수 있게 된다.
잘 설계된 공간은 고갈된 뇌의 에너지를 다시 북돋우는 배터리 역할을 한다. 행동경제학에서는 이를 ‘선택 아키텍처 Choice Architecture’라 부른다. 힘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좋은 선택을 하도록 환경을 설계하는 기술이다. 공간을 뇌 친화적으로 바꾸면 뇌가 매 순간 감당해야 할 긴장을 공간이 대신 짊어지게 된다. 좋은 공간은 훌륭한 의사나 다름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