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O CHAIRS ]인베스트먼트
케빈 워시의
앙시앵레짐과 AI
Writer. 박형중
(우리은행 WM상품부 Economist)
Photo. 프리픽, 한경DB
비밀이 권력이던 시절, 연준의 침묵이 깨지기까지
비밀주의와 엄숙주의가 중앙은행의 권위를 상징하던 시기가 있었다. 당시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가 끝난 뒤에도 금리 결정을 즉시 공개하지 않았다. 시장 참여자들은 자금시장의 움직임을 살피며 FOMC 결정을 추론하느라 늘 허둥지둥했다. 아는 것이 힘, 곧 정보가 권력이고 돈이던 시절이었다. 연방준비제도(이하 연준)가 오랜 비밀주의 관행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1994년이었다. 그해부터 FOMC 직후 정책 변경을 공표하기 시작했고, 1999년부터는 회의마다 성명서를 발표하는 관행이 자리 잡았다. 2011년에는 연준 의장의 정례 기자회견이 도입됐고, 2012년에는 위원들의 금리 전망을 담은 점도표가 공개됐다. 연준의 권위가 침묵과 정보의 독점이 아니라, 결정을 설명하고 시장의 기대를 형성하는 능력에서 나온다는 인식이 비로소 자리 잡았다. 그 결과, 소통은 통화정책의 부수적 행위가 아니라 그 자체로 중요한 정책 수단이 됐다.
침묵으로 돌아가는 연준, 앙시앵레짐의 부활?
케빈 워시는 지난 30여 년간 이어온 통화정책 흐름에 제동을 걸고 있다. 그가 연준 의장으로 취임한 이후 FOMC 성명서는 눈에 띄게 짧아졌고, 향후 정책 방향을 암시하던 선제(先提) 안내는 대부분 사라졌다. 점도표의 유용성을 재검토하는 작업에 착수했을 뿐 아니라, 연간 여덟 차례 열리는 FOMC 정례 회의를 줄이는 방안도 제기했다. 내년부터는 의장의 정례 기자회견이 유지될지도 불투명하다. 케빈 워시는 이를 비밀주의 회귀가 아니라, 시장의 가격 발견 기능을 복원하기 위한 시도라고 말한다. 연준은 말을 줄이고, 시장 참여자들은 스스로 데이터를 해석하고 대응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러나 연준이 시장과의 소통을 줄인다고 워시의 의도대로 시장이 더 합리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공식적 설명이 사라진 자리를 채우는 것은 객관적 데이터만이 아니다. 오히려 시장은 의장의 표정과 단어 하나, 확인되지 않은 보도와 위원들의 단편적 발언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심지어는 서로 정합되지 않는 정보들이 뒤섞이며 그럴듯한 서사가 만들어지고, 그 서사가 다시 자산 가격을 흔들 수도 있다. 워시가 의도한 것은 가격 발견의 복원이지만, 그 결과는 정보 비대칭과 변동성 확대가 될 수 있다. 그의 행보에서 중앙은행의 권위가 침묵과 불투명성에서 나오던 앙시앵레짐(Ancien Régim)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아날로그식 침묵과 디지털 AI의 역설
흥미로운 건 이처럼 복고적 통화정책 운영을 선호하는 워시가 가장 미래적인 기술인 AI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가 출범시킨 5개 태스크포스 중에는 경제 신호의 적시성을 높이는 ‘데이터’ 분야와 AI가 생산성과 고용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는 ‘생산성·일자리’ 분야가 포함돼 있다. 시차가 길고 수정이 잦은 전통적 경제통계의 한계를 보완해 실시간 데이터로 경제를 읽고, AI가 바꾸는 생산성과 임금 및 물가의 관계를 새롭게 파악하겠다는 구 상이다. 한데 연준이 정책 전망과 경로에 대한 설명을 줄이고, 그때그때 데이터에 반응하는 기관으로 바뀐다면 인간으로 구성된 FOMC만이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인 가에 대한 의구심은 피하기 어렵다. 방대한 실시간 자료를 수집하고, 물가와 고용에 미칠 영향을 계산하며, 데이터 의존성을 극단까지 밀어붙일수록 통화정책은 인간의 숙고가 필요한 공적 판단의 영역에서 멀어지고, 알고리즘이 풀어야 할 최적화 문제에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데이터가 계산할 수 없는 통화정책의 무게
금리 결정에는 물가안정과 고용 사이에서 어떤 위험을 더 감수할 것인지에 관한 사회적 선택이 담겨 있다. 같은 데이터를 보고도 서로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있으며, 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데에는 가치판단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 또 중앙은행은 과거에 존재하지 않던 충격을 해석하고, 경제구조의 변화와 금융시스템의 취약성, 정치적 현실까지 판단해야 한다. 무엇보다 독립된 중앙은행은 자신의 판단을 국민과 의회에 설명하고, 그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 통화정책은 계산만으로 완성되지 않으며, 계산의 정확성만으로는 민주적 정당성도 얻을 수 없다.
침묵이 불러올 존재 이유의 실종
인간으로 구성된 FOMC의 고유한 가치는 AI보다 많은 데이터를 처리하고 반응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불확실성 속에서 판단하고, 그 판단의 근거를 설명하며, 결과에 책임지는 데 있다. 소통이 줄어들면 이런 과정 자체가 외부에서 보이지 않게 된다. 연준이 소통을 축소할수록 인간 FOMC 위원들의 존재 이유는 미미해진다. 판단의 과정은 감춰지고 데이터에 대한 반응만 남는다면, 시장은 중앙은행의 일을 왜 더 빠르고 일관되게 처리하는 AI에 맡기지 않는지 묻게 될 것이다. 워시가 연준의 권위를 되살리려 하지만, 그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과거 중앙은행이 누린 권위와 영광이 아닐 수 있다. 오히려 중앙은행의 권위가 무엇에서 비롯되는지를 의심받는 ‘퇴색한 영광’일 가능성이 크다. 중앙은행이 입을 닫는 순간 잃게 되는 것은 정보만이 아니다. 인간이 통화정책을 결정해야 할 이유도 함께 사라지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