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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JUNE

©Cristobal Palma

©Cristobal Palma

[TREND]Architect

반복을 거부한 맥락의 건축

2026 프리츠커상 수상자
스밀한 라딕 클라크

Smiljan Radić
Clarke

2026년 프리츠커상 수상자로 선정된 칠레 건축가
스밀한 라딕은
대지의 역사와 사회적 맥락을
바탕으로 매번 독창적인 건축 해법을 제시해왔다.

건축의 가장 근본으로 돌아가 인간과 환경의
관계를 탐구해온 그의 건축 세계를 들여다본다.

Writer. 두경아 Photo. Pritzker Architecture Prize

©Cristobal Palma

©Cristobal Palma

암석 지대에 자리 잡아 건물을 대지 위에 올려두는 대신 바위와 결합시키는 형식으로 완성했다.

©Smiljan Radić

©Smiljan Radić

자연과 건축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 카르보네
  

올해 프리츠커상은 칠레 건축가 스밀한 라딕에게 돌아갔다. 프리츠커상은 1979년 미국 하얏트 재단이 제정한 상으로, 세계 최고 권위의 건축상이다. 칠레 출신 건축가가 상을 받은 건 2016년 빈민들을 위한 사회적 건축으로 유명한 알레한드로 아라베나 Alejandro Aravena가 수상한 데 이어 두 번째다.

라딕은 크로아티아인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나고 자란 이주민 집안 출신이다. 1995년 자신의 사무소를 개소했으며, 2017년에는 공공 교류와 기록 보관을 위한 ‘취약한 건축 재단 Fundación de Arquitectura Frágil’을 설립했다. 지난 30여 년간 그는 칠레를 비롯해 영국·오스트리아·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 등 전 세계에서 문화시설, 공공 공간, 상업 건물, 개인 주택 등 폭넓은 분야를 다뤄왔다. 이 과정 속에서 그는 반복 가능한 건축 언어를 거부하고, 근본 원칙에 기반한 고유한 탐구를 이어왔다. 맥락과 용도 및 인류학적 인식이 설계의 출발점이 되며, 대지는 물리적 조건을 넘어 역사와 사회적 실천 및 정치적 상황이 교차하는 장으로 이해된다. 건물은 특정한 조건에서 출발하며, 일관된 형식 대신 상황에 따라 형태를 달리한다. 예를 들어 산티아고 레스토랑 ‘메스티소’는 지면 위에 얹히기보다 일부가 땅에 묻힌 형태를 취하고, 파푸도에 있는 ‘피테 하우스’는 강한 바람과 빛을 피하도록 배치됐다. 프리츠커상 심사위원단은 “라딕의 건축은 형태보다 재료와 질감, 공간의 경험을 통해 이야기를 만든다”며 “건축의 가장 근본 요소로 돌아가 인간과 환경의 관계를 탐구한다”고 평가했다. 라딕은 수상 소감에서 “건축은 수 세기 동안 인간의 방문을 기다리는 거대하고 영구적인 형태와, 파리의 생애처럼 덧없고 불확실한 운명을 지닌 작은 구조물 사이의 긴장 속에 존재한다”며 “이러한 서로 다른 시간의 틈에서 사람으로 하여금 멈춰 서서 무심히 지나쳐온 세계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 경험을 제공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Iwan Baan

©Iwan Baan

철골 프레임 위를 정교한 반투명 막으로 마감한 바이오바이오 지역 극장

©Hisao Suzuki

©Hisao Suzuki

극장 내부는 띠 조명을 활용해 천장까지 격자 패턴을 이어갔다.

빛과 구조의 완벽한 변주

바이오바이오 지역 극장
Teatro Regional del Biobío

절제된 부피감과 섬세한 외장재의 구성으로 강변 풍경 속에 고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건물은 철골 프레임 위를 정교한 반투명 폴리테트라플루오로에틸렌 PTFE 막으로 겹겹이 덧씌운 구조로, 마치 하나의 오브제를 포장하듯 감싼 극장이라는 개념을 구현하며 현대 공공 건축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공학적으로 설계된 외장 시스템은 단순히 건물을 감싸는 데 그치지 않고, 외부의 빛을 여과해 내부 공간의 음향 성능과 시각적 쾌적함을 동시에 조절하는 핵심 역할을 수행한다. 이로써 건물 내부를 완전히 숨기지도,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도 않는 묘한 경계면을 형성한다. 따라서 낮 동안에는 외부의 강한 빛을 걸러내 실내의 눈부심을 방지하고, 밤이 되면 건물 내부의 빛을 밖으로 투과시켜 건물이 하나의 ‘빛나는 랜턴’처럼 은은하게 발광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건물 내부는 공연장과 연습실 등 기능에 따라 적절한 비례로 나눈 여러 개의 블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격자형 구조를 바탕으로 한 질서 속에서 공연 공간에 이르러 점차 구조가 느슨해지는 대비를 만들어낸다. 극장 중 한 곳은 띠 조명 Strip Lights을 활용해 천장까지 격자 패턴을 이어갔다. 프리츠커상 심사위원단은 라딕이 이 작품을 통해 공공 건축이 반드시 거대하고 기념비적이지 않아도 충분한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음을 증명했다고 보았다. 즉 요란한 장식 없이 구조를 세우고, 과시하지 않으면서도 빛을 발하는 방식으로 이 지역 극장은 공공 건축의 새로운 가능성을 설득력 있게 구현해 낸 것이다.





©Iwan Baan

©Iwan Baan

거대한 조약돌이 받침돌 위에 아슬아슬하게 얹힌 형상을 띠는 신비로운 모습의 갤러

고대 유적과 현대 감각의 조우

서펜타인 갤러리 파빌리온
Serpentine Gallery Pavilion

2014년 영국 런던 켄싱턴 가든의 잔디밭 위에 세워진 이 파빌리온은 스밀한 라딕의 이름을 세계 무대에 확실하게 각인시킨 상징적 작품이다. 이 구조물은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신비로운 모습으로 ‘안식처 Shelter’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제시했다.

건물의 가장 큰 특징은 겉면을 감싼 반투명 유리섬유 껍데기 Shell가 지역에서 공수한 거대한 천연석들 위에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놓여 있다는 점이다. 돌이 지닌 묵직한 무게감으로 대지에 안착해 있으면서도 막을 통해 걸러지는 빛의 움직임에 따라 공간은 매 순간 새롭게 깨어난다. 이는 고대 유적의 장엄함과 임시 파빌리온의 가벼움을 동시에 지닌 건축적 이중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특히 이 건물의 외장재는 단순히 빛을 통과시키는 것이 아니라 은은하게 여과한다. 낮 시간 동안 외벽을 타고 흐르는 햇빛은 시시각각 변하며 내부 공간에 생동감을 불어넣고, 밤이 되면 내부의 빛이 밖으로 배어 나오며 정원을 밝히는 거대한 등이 된다.

심사위원단은 이 작품에 대해 “구조체는 완전히 닫혀 있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열려 있지도 않다”고 평하며, 비록 한시적으로 세워진 임시 건축물이지만 질량과 표면, 그리고 대지가 완벽한 균형을 이루는 건축의 원형을 보여주었다고 극찬했다. 라딕은 이 파빌리온을 통해 가장 원시적 재료인 돌과 가장 현대적 재료인 유리섬유를 결합해 시대를 초월한 시적 공간을 창조해 냈다.





©Smiljan Radić

©Smiljan Radić

르코르뷔지에의 저서 <직각의 시>를 재해석한 숲속 집
  

©Gonzalo Puga

©Gonzalo Puga

내부에는 삼각형 중정이 자리 잡고 있으며, 이 중정은 자연광과 바람을 실내로 유입시킨다

침묵과 사색이 빚어낸 은신처

직각의 시를 위한 집
House for the Poem of the Right Angle

칠레 빌체스 Vilches 숲속에 위치한 ‘직각의 시를 위한 집’은 질서와 방위, 침묵을 바탕으로 설계한 주거 공간이다. 현대 건축가 르코르뷔지에의 저서 <직각의 시>를 재해석한 이 작품은 문학적 개념을 물리적 구조로 구현해 낸 사례로 평가받는다.

건물의 외관은 단순한 직사각 형태를 띤다. 검은색 에폭시 수지로 마감된 외장재는 주변 숲의 색채와 대비를 이루며 건물의 독립적 존재감을 드러낸다. 내부의 중심에는 외부의 정형성과 대조를 이루는 삼각형 중정이 자리 잡고 있다. 하늘을 향해 개방된 이 중정은 자연광과 바람을 실내로 유입시키며 공간에 입체적 변화를 준다.

심사위원단은 이 주택이 소음과 기후로부터 거주자를 보호하는 동시에 내면적 성찰을 돕는 구조를 갖췄음에 주목했다. 두꺼운 벽체는 외부 환경을 적절히 차단하고, 하늘을 향해 배치된 창들은 시간의 변화에 따른 빛의 움직임을 포착해 낸다.

거친 콘크리트와 매끄러운 유리, 대지의 돌을 활용한 재료 구성은 라딕 건축의 전형적 특징을 보여준다. 그는 이 주택을 통해 ‘직각’이라는 이성적 질서 안에 자연의 불규칙한 요소를 수용함으로써 기하학 구조와 인간의 감각이 조화를 이루는 거주 공간을 완성했다.





대지 위로 솟아오르기보다 주변 지형을 따라 수평으로 길게 확장되며 풍경 속으로 녹아든 비크 와이너리

풍경 속으로 사라지는 지형의 건축

비크 와이너리
Vik Millahue Winery

칠레 미야우에 계곡의 완만한 경사지에 자리한 비크 와이너리는 대지 위로 솟아오르기보다 주변 지형을 따라 수평으로 길게 확장되며 계곡의 풍경 속으로 녹아든다. 건물 규모를 지형의 흐름에 맞춤으로써 거대한 산업 시설이 자연을 압도하지 않도록 설계한 것이 특징이다.

이 건물의 백미는 입구에 조성된 거대한 광장, 이른바 ‘물의 거울’이다. 얕은 수면이 찰랑이는 이 광장은 주변 안데스산맥의 풍경을 투영하며 시각적 경이로움을 선사한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미적 장치에 그치지 않는다. 수면 아래 위치한 와인 저장고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해 주는 천연 냉각 시스템으로서 공학적 기능까지 수행한다. 물 위로는 라딕이 직접 배치한 바위들이 흩어져 있어 인공적 건축과 가공되지 않은 자연 사이의 정적 긴장감을 더한다.

내부 공간은 생산과 저장, 시음이 하나의 연속된 흐름으로 이어진다. 두꺼운 콘크리트 옹벽은 대지를 안정적으로 지지하며, 중앙 통로를 덮은 반투명 막 구조는 자칫 어두울 수 있는 지하 공간에 은은한 자연광을 투과시킨다. 이를 통해 작업 공간은 마치 거대한 동굴 속에 있는 듯한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심사위원단은 라딕이 구조와 방위의 세밀한 조정을 통해 광활한 대지의 기운을 건축적으로 안정감 있게 조화시켰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풍경에 순응하는 조용한 개입을 통해 대규모 와이너리를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사색적 공간으로 변모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