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Exist
[ LIFE & ]상식의 틀을 깨는 건축 스튜디오 ⑤
지역과 인간 중심 설계를 보여주다
류자쿤의 자쿤 건축
중국 건축이 대형화·서구화의 흐름을 타던 시기,
소박하고 절제된 건축으로
자신만의 길을 걸어온
건축가가 있다. 올해 프리츠커상 수상자인
류자쿤이다.
그가 이끄는 자쿤 건축은 ‘물처럼 공간에 스며드는 건축’이라는 화두를 일관되게 추구하며,
역사와 공공성을 담은 건축물을 선보여왔다.
Writer. 두경아 Photo. 하얏트 재단
‘세계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일컫는 프리츠커상의 올해 주인공은 중국 류자쿤 劉家琨이다. 상을 주관하는 미국 하얏트 재단은 선정 이유로 “류자쿤은 건축이 빠르게 진화하는 사회적·환경적 문제에 적절히 대응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활용 가능한 사회 문화적 자원을 최대한 이용해 현실과 이상을 조율하고, 정의로운 세상에 대한 설득력 있는 답변을 제시했다”고 밝혔다.
그는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건축가는 아니다. 다소 늦은 나이인 40대 이후 본격적으로 건축 활동을 시작했고, 주무대 역시 고향 청두와 인근 도시 충칭에 머물렀다. 건축가로 활동하기 이전의 행보 역시 독특하다. 그는 충칭 건축공학연구소(현 충칭대 건축학과)를 졸업한 뒤 국영 건축설계 사무소에서 근무했으나, 건축을 떠나 티베트와 신장성을 10년 동안 떠돌며 글쓰기, 그림, 명상 등에 몰두했다. 이 시기 그는 자신의 건축 철학을 담은 유토피아적 서사의 소설 <명월구상 明月構想>을 비롯해 건축 평론집 등 수십 권의 저서를 냈다.
1999년 그는 중국 최초의 개인 건축 사무소 중 하나인 ‘자쿤 건축’을 설립했다. 유행을 좇지 않고 ‘물처럼 공간에 스며드는 건축’을 내세워 역사와 공공성을 담은 소박하고 절제된 건물을 선보였다. 특히 2008년 쓰촨성 대지진 이후 잔해를 벽돌로 재생하는 ‘재탄생 벽돌 Rebirth Brick’ 프로젝트로 주목받았다. 이 작업은 자원 순환과 재앙 및 구원 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그의 건축 세계를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Jiakun Architects
쑤저우 황실 가마 벽돌 박물관. 자연광이 쏟아지는 개방형 천장을 따라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이 인상적이다.
옛것과 새것이 조화를 이루는 쑹양 문화지구.
©Chen Chen
©Chen Chen
한 블록 안에 여가·문화·주거·상업 기능을 아우른
복합 건축 프로젝트, 웨스트 빌리지
건축과 자연, 일상이 조화된 도시 공간
웨스트 빌리지 West Village
‘웨스트 빌리지’는 하나의 블록 안에 여가·문화·주거·상업 기능을 모두 담아낸 복합 건축 프로젝트로, 류자쿤 특유의 건축 철학을 잘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그는 도시의 밀도와 개방 공간을 서로 대립하는 요소로 보지 않고, 다양한 사회 구성원의 필요를 아우르는 새로운 형태의 시민 공간을 제안했다.
5층 규모의 이 건물은 한 블록 전체를 차지하며, 중·고층 건물이 주를 이루는 주변 도시 구조 속에서 시각적으로도, 맥락적으로도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건물은 경사진 보행로와 자전거 전용 길로 둘러싸여 있어 개방감과 경계감을 동시에 주는 독특한 공간감을 만든다. 건물 안뜰에는 문화, 스포츠, 여가, 비즈니스가 어우러진 활기찬 ‘도시 속 도시’가 자리 잡고 있다. 이 구조는 내부 활동을 감싸면서도 실내에서 틈과 열린 구조를 통해 주변의 자연과 도시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도록 설계됐다.
녹지는 지역 자생식물과 야생식물이 함께 어우러지도록 조성했다. 특히 속이 빈 벽돌을 구멍이 위로 보이게 세워 깔아 그 사이에서 풀이 자라도록 했으며, 토착 대나무 숲을 조성해 그늘과 휴식 공간을 만들었다.
©Qian Shen Photography
녹지는 지역 자생식물과 야생식물이 함께 어우러지도록 조성했다.
©Qian Shen Photography
건물은 경사진 보행로와 자전거 전용 길로 둘러싸여 있다.
©Arch-Ex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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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 양조 숨결을 품은 ‘살아 있는 문화유산’
수이징팡 박물관 Shuijingfang Museum
쓰촨성 청두의 수이징제 Shuijing Street에는 6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백주(중국 고량주) 양조장이 있다. 원나라 말에서 명나라 초에 설립된 이 양조장은 오늘날까지도 그 명맥을 이어오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지속적으로 운영해 온 주류 생산지 중 하나로 꼽힌다. 이곳을 기반으로 조성된 ‘수이징팡 박물관’은 단순한 전시 공간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잇는 ‘살아 있는 문화유산’ 그 자체다. 류자쿤은 기존 양조장과 새롭게 지은 건물을 조화롭게 어우러지게 했다. 신축 건물은 기존 저장고와 안마당을 둘러싸는 배치로 설계했으며, 쓰촨 전통 가옥의 맞배지붕 형태를 채택해 주변 도시 구성과 부드럽게 어우러진다. 지붕 틈새로 들어오는 햇빛은 원래 지하 저장고의 환기와 채광 방식을 재현했다.
박물관에는 옛 저장고와 발효 시설을 원형 그대로 보존·전시하고, 전통 양조 기법을 직접 시연하는 공간도 갖췄다. 전시 동선은 안마당과 전시관이 번갈아 나타나는 구조로, 건축과 자연이 어우러지는 리듬감을 형성한다. 전시 공간에는 기존의 목재부터 2008년 쓰촨 대지진의 잔해로 만든 친환경 재탄생 벽돌까지 다양한 자재를 사용했다. 관람객은 이곳에서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연대기적 여정을 몰입감 있게 체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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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자쿤은 기존 양조장과 신축 건물을 조화롭게 어우러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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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 틈새로 들어오는 햇빛은 원래 지하 저장고의 환기와 채광 방식을 재현했다.
빛과 그림자가 움직이며 해시계를 만들어내는 전시장
빛의 궤적으로 해시계를 만들다
문화혁명 시계 박물관 Museum of Clocks, Jianchuan Museum Cluster
독립적인 젠촨 建川 박물관 단지 한편에 자리 잡은 ‘문화 혁명 시계 박물관’은 고즈넉한 분위기 속에 있다. 주변은 북적이는 상업 시설들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는 전통 중국 도시에서 사찰과 그 주변의 상업·주거지가 이루는 극명한 관계를 연상시킨다.
건물 외관은 붉은 벽돌과 노출 콘크리트로 마감해 문화혁명 시기의 석조 건축 질감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3개 전시관은 사각형·원형·십자형 등 기하학 형태로 구성돼 있으며, 이러한 형태는 전시 공간 전반의 주제로 이어진다.
실내로 들어서면 곡선 벽과 직선 바닥이 대조를 이루며 공간에 긴장감을 부여한다. 벽면에 움푹 들어간 공간에는 수많은 역사적 시계가 전시되어 있는데, 광대한 규모는 몰입감을 더한다. 사각형 전시 공간에서는 관람객이 주변을 따라 순환하는 동선이 자연스럽게 유도된다.
전시의 마지막은 원형 붉은 벽돌 마당이다. 천장 중앙의 원형 개구부로 햇빛이 들어오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빛과 그림자가 움직이며 마치 해시계를 연상시킨다. 동시에 울림 효과를 만들어 관람객에게 소리, 빛, 그림자, 그리고 시간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경험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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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은 사각형, 원형, 십자형 등 기하학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벽면에 움푹 들어간 공간에는 수많은 시계가 전시되어 있다.
여러 매스가 모인 형태의 석조 미술관
자연과 빛이 스며든 공간
루예위안 석조 미술관 Luyeyuan Stone
Sculpture Art Museum
대나무 숲이 펼쳐진 강가에 자리한 루예위안 석조 미술관은 고대 불교 석조 조형물과 유물을 전시하는 곳이다. 류자쿤은 전시 동선을 따라 정원을 배치해 자연과 전시 공간을 유기적으로 연결했다. 관람객은 먼저 연못과 전통 중국식 정원을 만나고, 연못 위 보행로를 통해 미술관으로 들어선다. 대나무 울타리가 공간을 자연스럽게 구분해 주며, 경사로와 산책로를 따라 이동하는 동안 빛과 자연의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건물은 창이 없는 여러 매스가 모인 형태로, 매스 사이 틈새를 통해 자연광이 실내 깊숙이 스며든다. 외벽과 내부 벽은 나무 거푸집 무늬가 드러난 노출 콘크리트로 마감해 전시물의 배경이자 하나의 전시 요소가 되도록 했다. 벽돌 벽은 전선을 숨기기 위해 조각 처리했으며, 바닥과 지붕에는 속이 빈 관을 겹겹이 두어 단열 성능을 높이고 구조의 무게를 줄였다. 이러한 재료와 구조설계는 기능성과 심미성을 모두 충족한다.
미술관 내부는 개방감 있는 아트리움을 중심으로 여러 전시실이 이어지며, 자연·빛·공간이 어우러진 관람 경험을 제공한다.
©Bi Kejian
전시 동선을 따라 정원을 배치해 자연과 전시 공간을
유기적으로 연결했다
©Jiakun Architects
매스 사이 틈새를 통해 자연광이 전시 공간으로
깊숙이 스며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