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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APRIL

[SENIOR&]Local Tour

천년 가람으로,
나를 찾아 시간 여행을 떠나는 봄

봄이다. 봄은 되살아나는 시간이다. 언 땅이 녹고, 언 강이 다시 흐르기 시작할 즈음,
겨우내 아무도
찾지 않던 우물가에 먼저 와 있는 것들, 먼저 와서 도란도란 소식을 전해주는 것들.
남쪽 들녘에는
봄보다 꽃이 먼저 핀다. 봄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줄 고찰로 떠나보자.

Editor. 이광이(<행복은 발가락 사이로>,
산문집 <절절시시> 작가)
Photo. 김인호, 최배문, 이광이

납월홍매 臘月紅梅, 봄의 첫 화신 花信이다. 납월은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성도 재일(12월 8일)이 들어 있는 음력 섣달이다. 올해는 설이 일러서 그렇지, 대개 설 전에 핀다. 올 매화가 작년에 피는 셈이다. 이 꽃은 님은 어디쯤 오셨을까, 고개를 빼고 기다리는 사람들의 몫이다. 좀 게으른 우리는 봄이 사립문 안으로 들어왔을 때, 그러니까 3월의 매화를 보러 지리산에 간다.

각황전과 석등 뒤로 아름답게 핀 흑매

스님들이 각황전에 오르는 길. 뒤로 화엄사 대웅전이
보인다.

  1  

영겁의 시간이 빛나는 절

화엄사

지리산의 남사면, 아래로 섬진강이 흐르고 뒤로 노고단이 자리한 배산임수의 양명한 산자락에 화엄사가 있다. 544 년(진흥왕 5년) 신라의 고승 연기 조사가 창건한 천년 가람. 금강문을 지나 보제루에 서면 정면에 대웅전, 왼쪽에 각황전이 있다. 각황전과 그 앞의 석등, 웅장하면서도 안정된 균형감과 엄격한 조화미를 보여주는 걸작이다. 각황전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전각이고, 석등 역시 높이 6.4m로 제일 크다. 둘 다 국보다. 왜 이렇게 크게 지었는지 모르겠다고 주지 덕문 스님에게 물었더니 “산이 크잖아요” 한다. 산에 들어와 산을 못 보았느냐고 되묻는 것 같다. 각황전과 원통전 사이에 유명한 홍매가 있다. 조선 숙종 때 각황전을 중건하면서 계파 선사가 심었다고 하니, 수령 300년을 넘는다. 3월 초 꽃봉오리가 맺히고 개화하기 시작하면 경내에 은은한 향기 가득하다. 더 붉지 못하고 검어져 흑매黑梅라 한다. 그 앞에 서면 고혹적인 아름다움에 취해 넋을 잃고 바라보게 된다. 지난해 국가 자연유산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선암사 선암매, 백양사 고불매, 통도사 자장매와 더불어 사찰 매화 사천왕으로 불린다. 대웅전에 봉안된 목조 불상 같은 국보와 보물도 두루 둘러보고, 뜰에 서 있는 탑들과 그 사이사이 올벚나무, 들매화를 찾아보는 것도 좋다. 화엄사를 벗어나기 전에 꼭 들러야 하는 곳이 있으니, 서쪽 언덕에 자리한 사사자 삼 층 석탑이다. 불국사 다보탑과 더불어 이형 석탑의 쌍벽을 이루는 걸작이다. 네 마리 사자가 떠받치는 공간 안에 여인이 있다. 탑 앞에는 석등이 서 있는데 그 등 아래 무릎을 꿇고 앉은 스님이 조각되어 있다. 효성이 지극했던 연기 조사가 어머니에게 차를 공양하는 모습이라 한다. 일명 효대 孝臺다. 그저 돌로 보이면 쉬 떠나고 말지만, 출가한 모자 간의 애틋한 이야기를 듣고 보면 한참을 머무르게 된다.

사찰 차의 명인 덕제 스님이 녹차를 덖고 있다.

천연 그대로, 모과나무 기둥이 일품인 구층암

  2  

천년을 견뎌온 야생 차밭을 품은 곳

화엄사

큰 절에서 나와 산으로 조금 걸어 오르면 산내 암자 구층암이 있다. 마당에 탑의 돌조각을 모아 1961년 복원한 삼층 석탑이 서 있다. 모양은 찌그러졌어도 천년을 견뎌온 것이다. 모과나무 고목을 그대로 기둥 삼아 지은 요사채는 자연과 건축물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잘 보여준다. 암주 덕제 스님은 손꼽히는 차의 명인이다. 화엄사 야생 차밭은 쌍계사 차밭과 더불어 우리나라 차 시배지 始培地 논쟁으로 유명하다. 828년 당에 사신으로 간 신라 대렴공이 차씨를 가지고 돌아왔는데, 왕이 이를 귀히 여겨 지리산에 심게 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한다. 화엄사는 사사자삼층석탑 앞 ‘석등헌다상’이 차와 관련된 최고의 유물이라는 것을, 쌍계사는 수백 년 된 우리나라 최고 수령의 차나무가 있다는 것을 근거로 세운다. 이런 논쟁은 사람들에게 두 곳 다 가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역설을 얻는다. 암자 산자락을 둘러 약 8만2,645㎡ (2만5,000평) 규모의 야생차밭이 있다. 이 넓은 차밭의 총관리인이자 차 생산자가 덕제 스님이다. 사월이 되면 차나무에 새싹이 튼다. 곡우 즈음에 스님은 마을 주민 20여 명의 일손을 사서 차 농사를 시작한다. 한 달가량, 잘 자란 것은 세 번, 느린 것은 한 번 딴다. 찻잎은 한데 모여 세 종류의 차가 된다. 흔히 녹차라 불리는 ‘덖음차’, ‘발효차’, ‘후발효차’. 녹차는 뜨거운 솥에 여러 번 유념 揉捻을 해서 만들고, 발효차는 청국장 뜨듯이 독 안에 차를 넣고 불을 때서 발효시킨 차다. 스님은 천년, 화엄사 차맥을 잇는 ‘다승 茶僧’인 셈이다. 제다 비법을 물으니 “나무를 화나게 하지 않는 것”이라 했다. 기르지도, 자르지도, 꺾지도 않고 대숲 그늘의 차나무에서 조심스레 잎만 딴다. 큰 절에서 꽃을 보고, 암자에 들러 해차 한 잔 얻어 맛보는 일. 봄바람이 불 때 이만한 호사가 어디 있겠나 싶다.

대견사 삼층 석탑

비슬산 대견사로 가는 길

초파일을 앞둔 대견사의 모습

  3  

일연 스님이 살았던 진달래 고원

대견사

매화는 눈 속에서도 피어 고고한 세한고절 歲寒孤節을 뽐내지 만, 두루 붉게 한판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것이 진달래다. 진달래는 잎보다 꽃이 먼저 피고 화전을 부쳐 먹을 수 있어 ‘참꽃’이라 하고, 철쭉은 잎이 나고 꽃이 나중에 피되 먹을 수 없어 ‘개꽃’이라 한다. 5월, 지리산 세석평전에서 펼쳐지는 꽃 세상은 ‘철쭉제’이고, 대구 비슬산 대견사 산정에서 만개하는 꽃 세상은 ‘참꽃 축제’다.
대견사는 비슬산 정상 바로 밑, 얼굴의 눈썹쯤에 오목하게 앉아 있다. 지리산 법계사, 설악산 봉정암과 더불어 1,000m가 넘는 고지에 자리한 몇 안 되는 비보 사찰이다. 비슬 琵瑟은 신선이 비파 琵와 거문고 瑟를 타는 모습과 닮았다 해서 이름 지어졌다. ‘대견 大見’은 ‘크게 보고, 크게 느끼고, 크게 깨친다’는 뜻이다. 창건은 신라 헌덕왕(809~826) 때로 추정한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 스님이 계셨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1227년 스물둘의 나이로 승과에 급제해 초임 주지로 부임한 곳이 ‘보당암’이다. ‘비슬산 정상 가까운 곳에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둘러싸 있고 일망무제의 올망졸망한 산세, 낙동강이 발아래 굽어 보이는 곳’이라는 기록에 바탕해 보당암을 지금의 대견사로 본다. 스님은 22년간 머물면서 <삼국유사>의 ‘사초 事草’를 닦았다. 대견사는 몽골 침입 등 외침으로 얼룩진 이 땅의 고된 역사와 함께 ‘사 寺’와 ‘사지 寺址’를 오가는 생멸을 거듭했다. 2014년 이곳에서 ‘개산대재’가 열리면서 절터는 다시 절로 환생했고, 스리랑카 쿠루쿠데 사원에서 부처님 진신 사리 1과를 기증받아 적멸보궁이 되었다.
4월이면 이미 졌을 진달래가 비슬산에서는 절정이다. 절에서 능선을 따라 대견봉으로 이어지는 약 99만 1,736㎡ (30만 평)의 드넓은 평원에는 분홍빛 눈이 내린 듯, 연분홍 비단이 깔린 듯 진달래 군락이 장관을 이룬다. 절이 붉은 망토를 두른 그 비경을 찾아, 봄이 완연하거든 전기차(셔틀) 타고 산에 올라볼 일이다.

관룡사 용선대. 출항하는 지혜의 배, 반야 용선의 형상을 하고 있다.

  4  

마음으로 보는 사찰

관룡사

창녕 관룡사 觀龍寺는 원효대사가 백일기도를 마치고 회향하던 날, 갑자기 화왕산 마루에 뇌성벽력이 치더니 삼지 三池에서 용이 승천하는 것을 보았다는 데서 이름을 가져왔다. 용이 승천하는 것을 정말 보았을까? 그래서 ‘관룡 觀龍’이다. 눈으로 들어오는 것이 ‘견 見’이고 마음으로 들어오는 것이 ‘관 觀’이다. ‘관자재보살’ 할 때 그 ‘관’이다. 그래서 관룡사에 가더라도 아무나 용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394년(신라 내물왕 39년) 창건됐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을 때 목조 법당 하나 화마를 피했으니, 약사전이다. 스님이 이를 기이하게 여겨 살펴보다 들보 끝에서 ‘영화 5년 기유 永和五年己酉’라는 기록을 발견한다. 그 후로 관룡사에서 기도를 올리면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는 소문이 났고, 사람들이 널리 찾는 수행지가 되었다고 한다.
소원이 정말 이뤄질까? 예전에 주지 우현 스님에게 물었을 때, 이뤄진다고 믿으면 이뤄지는 것이라 했던 기억이 난다. 신해행증 信解行證, 믿고 알고 행하고 증득하는 것. 앎보다 믿음이 먼저라고 했다. 경내에서 나와 산길을 오르면 용선대 龍船臺가 나온다. 깎아지른 듯 바위가 솟아오른 벼랑 위에 산과 들과 마을들, 탁 트인 풍광이 펼쳐져 있다. 바위는 출항을 앞둔 배의 형상이고 그 끝에 신라의 석불이 선장처럼 앉아 있는 모습, 관룡사의 백미다. 여기가 한 가지 소원을 비는 곳이다. 그 바람 아래 발원하고 있으면, 문득 깨달음이 올 때가 있다. 소원이란 부처님이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는 길 위에 있다는 것, 도달이 아니라 여정에 있다는 것을 석불은 소곤소곤 들려준다. 그 바람이 전하는 소리를 들은 사람은 벌써 도착했고, 여태 부처님 옷자락을 놓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아직 멀다. 관룡사의 ‘용’은 보일 듯 보이지 않고,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회암사지 부도탑 뒤로 석양이 지고 있다.

  5  

흥망성쇠의 무상함을 남긴 거대한 절터

회암사지

양주 회암사지 檜巖寺址. 천보산 아래 부채꼴로 펼쳐진 축구장 5개 크기의 거대한 절터로 전각이 262칸, 암자가 17개에 달했으며, 승려 3,000명이 살았다는 여말선초 제일의 왕 찰 王刹. 지금은 돌과 풀이 가득하고, 바람이 지나가는 빈 들이다.
회암사는 고려 충숙왕 15년(1328) 인도의 고승 지공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해온다. 지공의 제자 나옹에 이르러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나옹의 제자가 이성계의 꿈을 풀어 왕이 될 것을 예언했다는 유명한 무학 대사다. 지공, 나옹, 무학이 회암사의 3대 화상이다. 회암사 하면 빼놓을 수 없는 한 인물, 20년간 사실상 여왕으로 군림했던 조선 최고의 여걸 문정왕후다. 드라마 <옥중화>에서 김미숙이 열연한 여인. 8년 수렴청정에 이어 12년간 최고 통치자로 권력을 휘두른 중종의 부인이자 명종의 어머니. 억불숭유의 국시에 보란 듯이 승려 보우를 병조판서에 임명하고, 전국에 300여 개의 절을 공인한 인물. 그 덕에 회암사는 조선의 국찰로, 해동 제일의 가람으로 한 시대의 영화를 누린다. 그러나 왕후가 세상을 떠난 직후 보우는 피살되고 회암사는 불길에 휩싸였으니, 흥망성쇠의 무상함이 이와 같다.
동편 언덕에는 승탑과 석등, 비석이 남아 있다. 무학 대사 승탑과 쌍사자 석등은 조선 전기 부도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걸작으로 꼽힌다. 지공과 나옹의 승탑과 석등도 단아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 사지여도 볼만한 것이 많다.
은허맥수 殷墟麥穗라 하여 ‘은성했던 은 殷나라의 궁궐터에 보리 이삭만 패어 있다’는 탄식처럼, 돌과 풀이 무성한 사지는 애잔하고 쓸쓸한 느낌을 자아낸다. 그래서 사지는 마음이 헛헛할 때 홀로 가는 것이다. 여기저기 거닐며 시간 여행을 하다 보면, 외로운 마음이 많이 가신다. 외로울 때는 더 외로운 것을 만나야 덜 외로워지는 법인데, 그때는 지만 한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