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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MBER+DECEMBER

[SPECIAL THEME]Report

소비자라 쓰고 팬이라 부른다

요즘 대세,
‘내러티브’파워

에스파와 나비스,빙그레우스, 제페토를
안다면 당신은
성공적인 ‘내러티브’의
진면목을 경험한 셈이다.
‘서사’를 뜻하는 내러티브는
단순한 기업 마케팅을 넘어
문화의 대세가 됐다.

Writer. 유나리
Photo. 셔터스톡, 스타벅스, 한경DB

신화와 소설에서 모티브를 얻어 탄생한 스타벅스
로고

내러티브Narrative의 정확한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실화나 허구의 사건을 묘사하고 표현하는 구조적 형식.’ 알 듯 말 듯 이해가 잘 안 된다면 어원을 보자. ‘말하다’, ‘서술하다’를 뜻하는 라틴어 ‘Narro’와 ‘알다’,‘친숙하다’를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 ‘Gan’에서 유래했다.
스토리텔링Story Telling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재미있고 생생한 이야기로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행위를 일컫는다면, 내러티브는 스토리텔링을 잘하기 위한 구조나 골자 등을 말한다. 단순히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스토리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게 구조화해 표현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내러티브는 소설 같은 문학은 물론이고 영화, 공연 같은 시각적 장르에서도 잘 쓰인다. 내러티브는 언어로 기술할 수 없는, 모든 종류의 서사성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내러티브 안에는 이야기가 있고,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다양한 장치도 담겨 있다.

브랜드가 사랑하는 내러티브

단어는 생소하지만, 내러티브는 우리 생활 아주 가까이에 있다. 특히 브랜드에서 찾기 쉬운데, 브랜드를 알리고 친숙하게 하는 작업이 브랜딩인 만큼 당연히 내러티브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 내러티브는 브랜드가 전하고자 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담을 최고의 그릇인 셈이다.
우리의 일상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이 바로 스타벅스다. 스타벅스의 로고 사이렌은 ‘세이렌이 뱃사람을 홀리듯 사람들을 홀리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사명은?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에서 가장 차분하고 이성적인 인물인 ‘스타벅’이 모티브. 아마도 이성적인 스타벅을 홀릴 정도로 맛있는 커피 전문점을 표방한 것이 아닐까. 이런 내러티브, 서사는 사람들에게 브랜드를 쉽게 각인시키고 특정 인상을 주기 좋다. 유명한 베르사체의 메두사 로고는 눈을 마주치면 모든 사람을 돌로 만드는 신화 속 메두사처럼 ‘베르사체의 작품을 한번 본 순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의 강렬함으로 사람들을 돌처럼 굳게 만들겠다’는 원대한 브랜드의 포부가 담겨 있다.


소비자를 팬으로

요즘 이 내러티브가 다시 인기다. 이렇게 과거에는 간단하게 로고나 사명, 브랜드의 의미 정도를 설명하는 요소 중 하나에 불과하던 내러티브가 아예 브랜드 자체를 끌고 가는 수레가 됐다. 이제 창업주의 고난과 어린 시절 일화만 으로 만들어지는 내러티브는 통하지 않는다.
김난도 교수는 ‘내러티브 자본’을 2022년 트렌드 중 하나로 꼽고, 갈수록 커지는 서사의 힘을 강조한 바 있다. 그는 “서사는 힘이 강력하다. 강력한 서사, 즉 내러티브를 갖추는 순간 당장은 매출이 보잘것없는 회사의 주식도 천정부지로 오를 수 있다”고 언급한다.

루이 비통의 첫 팝업 레스토랑 ‘피에르 상 앳 루이 비통’의 피에르 상 부아예 셰프

구찌가 오픈한 구찌 아스테리아 서울

“의식 있는 자본주의에 관심이 많은 요즘 젊은 소비자들은 그들이 중시하는 가치에 부합해야 브랜드에 돈을 쓰기 때문”이다. 내러티브는 이런 가치를 담기에 가장 효과적인 그릇이라는 설명이다. 소비자를 팬으로 만들어야 돈을 쓰고, 팬으로 만들기 좋은 전략이 내러티브라는 이야기.
또 몇 년간 이어진 코로나19 사태의 위기 속에서 내러티브의 힘이 더 커졌다고 분석한다. 사람들이 외로움, 고립감을 느낄수록 내러티브가 주는 정서적 효과에 크게 반응한다는 것. 내러티브는 브랜드가 만든 ‘○○○스러운’, ‘○○다운’ 세계에 소비자가 동의하면 강력한 팬덤을 형성시키기도 한다. 애플을 광적으로 사랑하는 소비자를 말하는 ‘앱등이’라는 단어를 떠올려보라. 이들은 스스로 앱등이 라고 불리는 것에 거리낌이 없고, 이를 숨기지도 않는다. 신세계는 올해 신년사를 통해 “신세계만의 디지털 생태계인 ‘신세계 유니버스’를 만들어 그룹의 콘텐츠와 자산을 모두 연결해 고객에게 더 큰 가치를 제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요즘 브랜드의 방향성이 모두 담긴 문장이다.
여기서 주목할 단어는 바로 ‘생태계’와 ‘유니버스’. 여기에 최근 인기인 내러티브 전략의 특징과 흐름이 담겨 있다.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브랜드 고유의 ‘생태계’, ‘유니버스’를 만들어 고객이 그 속에 살게 하는 것. 그래서 요즘 내러티브는 장르를 뛰어넘는 크로스오버에 스케일도 더 커지고 정교해졌다.


온몸에 빙그레 제품을 휘두른 빙그레 왕국의 왕자
‘빙그레우스’


빙그레 우서에서 만든 집콕족을 위한 굿즈들

제페토와 컬래버레이션 한 구찌. 아바타에 구찌 아이템을 착용시켜 젊은 소비자층이 구찌를 친숙하게 여기도록 했다.


유니버스, 생태계, 세계관까지 브랜드의
‘광야’ 각축전

전통적으로 내러티브 전략과 가까웠던 패션업계는 생태계 만들기에 집중한다. 구찌는 ‘구찌 레스토랑’을 열어 구찌 버거를 팔고, 루이 비통은 미쉐린 3스타 셰프와 함께 팝업 레스토랑을 열었다. 이들이 파는 건 단순히 맛있는 음식이 아니다. 브랜드가 지향하는 라이프스타일을 오감으로 느끼게 하는 강력한 ‘경험’이다.
‘세계관’을 만드는 브랜드도 있다. 빙그레는 빙그레 왕국의 후계자 ‘빙그레우스 더 마시스’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빙그레의 인기 제품을 의인화해 순정 만화풍의 요절복통 세상으로 재탄생시킨 세계관 마케팅으로 열풍과도 같은 큰 인기를 얻었다. 빙그레우스의 등장 이후 빙그레의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는 16만 명대로 이전 대비 70%가량 급증했다. 업계 1위의 수치이자, 인스타그램에서 팔로워를 모으기 쉽지 않은 식음료업계인 것을 감안하면 대단한 수치다. 사람들은 빙그레 왕국을 방문해 빙그레우스와 함께 놀고, 브랜드를 자연스럽게 주변에 전파한다. 빙그레의 올 1분기 매출은 전년 대비 9% 증가했다. 같은 기간 내 경쟁사의 매출은 줄었다.

세계관 마케팅으로 큰 화제를 모은 걸 그룹 에스파

BTS가 콜드플레이와 협업해 내놓은 ‘마이 유니버스’ 뮤직비디오 속 한 장면


엔터테인먼트업계에서 내러티브 전략을 적극 활용하며 앞서가는 곳은 바로 SM. 2020년 데뷔한 그룹 에스파는 멤버들이 ‘자신의 또 다른 자아인 아바타를 만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다’는 독특한 서사로 결성된 그룹. 이들은 실제 멤버와 아바타 멤버 ‘아이’ 4명이 교류하며 함께 활동한다는 콘셉트로 만들어졌다. 에스파 멤버와 ‘아이’의 연결을 방해하는 존재인 ‘블랙맘바’와 에스파가 나가려는 공간인 ‘광야’가 있다. 이를 기점으로 SM은 ‘광야’를 SM의 세계관을 아우르는 오프라인 플랫폼으로 만들고 엔터테인먼트 활동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
하이브의 BTS 또한 독특한 세계관으로 인기를 모은 대표적 그룹이다. BU 세계관BTS Universe이 선풍적 인기를 끌며 이들의 이야기는 웹툰으로도 만들어졌다. 내러티브는 이렇게 열린 구조라 확장되기 쉽다.
브랜드의 사례 말곤 없을까. 의외일 수 있지만 근래 들어 내러티브 전략이 통한 대표적인 것이 바로 ‘비트코인’이다. 경제학자 로버트 쉴러는 저서 <내러티브 경제학>에서 비트코인이 이토록 흥행에 성공한 원인으로 ‘내러티브’가 확실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정체가 명확하지 않은 무 정부주의자로 추정되는 천재가 비트코인이라는 최첨단 기술을 발견해 어마어마한 갑부가 됐다’는, 마치 그리스 서사에나 나올 법한 짧지만 확실한 내러티브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었다는 것이다. 앞으로 신기술을 쥔 사람이 승자가 될 것이라는 새로운 내러티브, 또 암호화폐라는 수단을 통해 기존의 권위로 대표되는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요즘 사람들의 탈정부적 사고방식이 맞아떨어져 비트코인은 전 세계를 휩쓸었다. 쉴러는 이렇듯 요즘 경제를 “데이터에 의존하는 전통적 경제 이론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며 ‘내러티브 경제학’을 내놨다. 요즘엔 ‘PDRPrice Dream Ratio’라는 주식 용어까지 나왔다. 바로 ‘주가 대비 꿈 비율’이다. 내러티브의 힘을 정량적으로 평가하려는 시도까지 등장한 것이다. 여러모로 내러티브가 대세다.

진짜 중요한 것은 진정성

내러티브 전략은 일견 신빙성이 없고 허무맹랑해 보일 수 있다. 가상의 이야기를 잘 직조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이 가상의 이야기와 세계관을 성공적으로 직조하기 위해 꼭 필요한 건 무엇일까. 놀랍게도 이 가상의 것들의 핵심은 바로 ‘진정성’과 ‘적정성’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김난도 교수는 “신문 전면 광고에 ‘우리 기업은 이제부터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을 실천하겠습니다’라고 광고해놓고 정작 이사회에 여성이 한 명도 없거나 장애인 고용률을 지키지 않는 사례가 있다”고 언급했다. 이건 기업이 설계한 내러티브에 맞지 않는 행동이다. 말뿐인 내러티브는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는 것. 그마저도 신뢰를 얻기 어려운 일회용 캠페인 정도로 그치기 딱 좋다. 행동과 세계관이 일치하는 실제적 행동과 맞아떨어져야 세계관이 진정성을 갖고 사람들 속에 침투해 지속될 수 있다. 결국 내러티브가 말하는 건 총체적 체질 개선이다. 명확하게 방향을 정하고 그에 맞춰 모든 것이 변화해야 전략을 제대로 세울 수 있다는 것. 이는 비단 브랜드뿐 아니라 변화를 앞두거나 필요한 모든 사람이 새겨볼 만한 전략이다.

비트코인의 서사는 가장 강력한 내러티브의 힘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