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IFE & ]도시를 바꾸는 현대 건축가 ③
건축으로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사회운동가
야마모토 리켄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
올해 프리츠커상 수상자는 일본 건축가 야마모토 리켄이다.
프리츠커상 심사위원단은 그를 “조화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공적·사적 영역 사이의 유대 관계를 구축하는 건축가이자 사회운동가”라고 평가했다.
Editor. 두경아
Referance . 프리츠커 건축상
도쿄 임대주택 단지 시노노메 커낼코트 코단. 야마모토 리켄은 2층을 공용 덱과 테라스, 녹지 공간으로 구성해 이웃이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일본 건축가 야마모토 리켄은 ‘공동체를 이어주는 건축가’로 평가받고 있다. 야마모토는 함께 모여 사는 사람들이 공간을 공유해야 한다는 ‘지역 사회권’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주장해왔다. 이러한 신념에 따라 그는 테라스, 공동 안뜰, 야외 공간 등 공용 장소가 있는 건축물을 다수 선보여왔다. 프리츠커상 심사위원단의 말에 따르면, 그의 건축물에는 “공적 차원과 사적 차원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고,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만날 기회를 늘려준다”는 특징이 있다.
야마모토가 이러한 건축 철학을 품게 된 데에는 유년 시절의 영향이 크다. 1945년 중국 베이징에서 태어난 야마모토 리켄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로 이주했다. 그가 유년기를 보낸 집은 전통적인 일본 상가 건물이었는데, 앞쪽이 상가 공간이고 뒤쪽이 생활공간이었다. 공적인 공간과 사적인 공간이 문턱 하나로 나뉘어 있는 것이다. 그는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나는 그 두 공간 사이 문턱에 앉아 있었다”라고 회상한다. 그는 1968년 니혼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1971년 도쿄예술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고, 도쿄대학교 생산과학기술연구소의 하라 히로시 교수 아래서 공부를 계속했다. 1973년 ‘리켄 야마모토 & 필드 숍’ 건축설계사무소를 차린 뒤, 50여 년에 걸쳐 일본을 비롯해 스위스·중국·한국 등지에서 개인 주택, 공동주택, 학교, 대학 캠퍼스, 관공서 등을 설계해왔다.
야마모토 리켄은 ‘사회운동가’로 불리는 건축가다.
혼자 사는 사람도 고립되지 않는 집
일본 구마모토 호타쿠보 주택 단지
야마모토 리켄은 공부를 마친 뒤, 스승이자 멘토인 히라 히로시와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나라마다 다른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구분에 대해 탐구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그는 사무소를 차린 뒤 개인 주택 설계 의뢰를 받아 개방형 테라스를 가진 집을 고안했고, 자신의 집도 지었다. 그의 집은 테라스와 옥상에서 이웃과 교류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 특징이다. 일본 규슈 구마모토현에 위치한 후타쿠보 주택 단지는 1991년에 진행한 야마모토 리켄의 첫 번째 집합 주택 프로젝트이자, 건축가들 사이에서 “일본의 주거 문화를 한 단계 격상시킨 작업”이라고 평가받는 작품이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전통적 상가 주택과 그리스 공동체 주택 오이코스 Oikos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건물 4동이 중앙 정원을 둘러싸고 있는 블록형 집합 주택이다. 모든 주택에는 2개의 출입구가 있는데, 하나는 외부로, 다른 하나는 공동 정원으로 연결된다. 개별적인 유닛을 이루는 주택은 정원을 향해 열린 테라스 덕분에 생활공간이 확장된다. 거실·주방 등 생활공간은 정원을 향하고 있지만, 침실은 반대편으로 내어 프라이버시를 확보할 수 있게 했다. 덕분에 입주민들은 정원을 공유하며 삶을 나누고 있다고 한다.
테라스와 옥상을 통해 이웃과 교류할 수 있는 야마모토 리켄 자택
“일본 주거 문화를 한 단계 격상시킨 작업”으로 평가받고 있는 호타쿠보 주택 단지
프라이버시와 상생 사이의 줄다리기
강남 하우징 & 판교 하우징
야마모토 리켄은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건축물을 설계했다. 경기 성남시 ‘판교 하우징’(월든힐스 2단지 아파트)과 서울 ‘강남 하우징’(세곡동 보금자리주택 3단지)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의 사회적 교류에 중점을 둔 건축 철학은 우리나라에서는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야마모토는 2012년 모든 가구 현관문을 통유리로 설계해 밖에서도 집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구조로 강남 하우징을 디자인했다. 입주민 간 상생과 소통을 염두에 둔 설계였으나, 프라이버시 보호에서는 한계가 드러나 입주민 대부분이 통유리에 블라인드를 치거나 시트지를 붙여야 했다. 2010년 야마모토가 설계한 판교 하우징 역시 마찬가지. 한 가구당 3~4층을 쓰는 복층 구조로, 중정을 배치하고 외관을 통유리로 마감한 점이 특징이다. 모든 주택이 현관으로 통하는 2층의 공유 테라스를 품고 있으며, 마주 보고 있는 각 세대 현관은 사방이 유리 벽인 현관 홀을 통해 들어가도록 설계했다. 이 역시 입주 희망자들에게 거부감을 일으켰고, 대거 미분양 사태를 초래했다. 그러나 10여 년이 지난 지금은 공동 테라스와 공동 정원이 지역 커뮤니티를 활성화하는 역할을 제대로 해내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주민들이 건축가에게 감사 편지를 보내 야마모토가 직접 방문했을 정도.
야마모토 리켄이 설계한 판교 하우징은 세대마다 현관으로 통하는 2층 공유 테라스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야마모토 리켄이 설계한 판교 하우징은 세대마다 현관으로 통하는 2층 공유 테라스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분양 초기 반발이 극심했던 것과 달리, 지금은 공유 공간 덕분에 이웃과의 커뮤니티가 활성화됐다고 한다.
자연을 더 돋보이게 하는 건축
일본 요코스카 미술관
도쿄 남부 미우라 반도에 자리 잡은 요코스카는 바다와 산으로 둘러싸여 사방이 절경을 이루는 도시다. 이곳 바닷가에 위치한 요코스카 미술관은 야마모토 리켄이 이처럼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훼손하지 않도록 건물 대부분을 지하화해 2006년에 선보인 건축물이다. 미술관 입구는 도쿄만과 인근 산을 연상시키도록 디자인했으며, 옥상과 전망대를 겸하는 곳으로서 도쿄만을 조망하는 포인트로도 사랑받고 있다. 일본 5대 절경 미술관 중 하나로 꼽힐 정도다. 미술관이 바닷가에 있다 보니 전시물이 쉽게 부식될 위험도 존재한다. 야마모토는 이러한 문제를 고려해 건물 둘레에 레스토랑과 판매 시설 등을 배치했고, 중심부에 전시동과 수장동이 들어서도록 설계했다. 전시동과 수장동은 유리와 철판을 사용해 이중으로 둘러싸여 있어 온도와 빛 등 외부 요인을 효과적으로 차단한다.
야마모토 리켄은 외부 환경으로부터 전시물을 보호하기 위해 레스토랑과 판매 시설을 미술관 바깥쪽에 배치했다.
요코스카 미술관은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해치지 않도록 건물의 대부분을 지화화했다.
소방관과 지역 주민의 상호 헌신 유도
일본 히로시마의 소방서
2000년에 지은 히로시마의 소방서는 전면, 내부 벽, 바닥을 모두 유리로 마감한 투명한 건물이다. 덕분에 지역 주민 누구든 소방관이 어떤 일을 하는지 볼 수 있다.
이는 “소방서는 지역사회를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라는 야마모토의 철학을 반영한 것으로, 소방관 또한 존경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부각한다. 건물은 소방관이 훈련하는 큰 아트리움을 중심으로 각각의 공간이 배치돼 있으며, 방문객은 로비를 통해 다양한 작업 공간이 내려다보이는 4층 테라스까지 올라갈 수 있다.
투명한 히로시마 소방서 건물은 소방관이 시민을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보여주기 위해 통유리로 지었다.
중세도시와 같은 공항 부속 건물
스위스 취리히 공항 ‘더 서클’
야마모토 리켄이 2020년에 설계한 ‘더 서클’은 레스토랑·바·호텔·컨벤션 센터 등이 들어선 공항 부속 건물로, 대지 면적 3만 7,000m2(1만 1,192평)의 엄청난 규모를 자랑한다. 이 건물은 고속도로와 넓은 공원 사이에 자리 잡아 그 자체로 ‘문턱’ 역할을 한다.
고속도로에 맞닿은 부분은 성벽처럼 단순한 외관을 띠며, 반대편 공원에 맞닿은 부분은 골목과 광장이 있어 혁신적이면서도 친근한 느낌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이 건물은 유연하다. 레스토랑·브랜드 숍·호텔로 이용할 수 있게 설계했고, 인접한 2개의 건물을 하나로 사용할 수도 있다. 야마모토는 이 건물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기술, 건설 방법, 디자인으로 중세도시의 구조를 다시 만들고 싶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중세도시의 구조에서 착안해 조성한 스위스 취리히 공항 ‘더 서클’